한번 사용한 나를 다시 반 접어쓰는 날

2026-08-17

한번 사용한 나를 다시 반 접어쓰는 날 artwork
윤덕원 2집 “한번 사용한 나를 다시 반 접어쓰는 날” 앨범 소개 종종 막히고 상시 답답한 상태에 놓이는 (그러나 계속 만들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오래 묵은 창작자로서 계속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감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고 낮잠을 청하던 날들에서 비롯된 노래들이 쌓여서 곁가지가 길게 늘어졌습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앨범을 내겠다는 계획은 할까 말까 곱씹다 보니 다시 늦어지고 늦어졌습니다. 한 번 사용한 휴지 같은 마음이라도 뭔가 훔쳐낼 수 있기를 바라며 이것저것 뒤져보니 밴드를 시작하기 전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던 데모가 있더군요. 그리고 아직 발표하지 못한 (아직 기억하고 있는) 스물한두 살의 창작곡들, 거기에 간혹 마음이 동해 만들었던 흔적들을 꺼내어 놓으니 한 장의 앨범이 완성되었습니다. 우습지만 가장 어설펐던 시절의 노래들도 아직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노래는 남아서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군요. 한 시절을 갈아 넣어 만들었던 노래는 오래 남는 기억의 조각 같습니다. '그래 잘 만드는 게 능사는 아니야.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지.' 하는 다 아는 깨달음이 다시 들이닥칩니다. 이제 녹음만 하면 끝나겠네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노래가 떠올라서 급하게 정리해 마지막 트랙을 완성했습니다. 왠지 뺄 수도 없고 넣기에는 조금 다른 시절의 음악 같은데. 음원으로는 공개하지 않고 시디로만 남기면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으로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노래를 하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노래를 듣고 또 지나가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은 그 졸업생들에게 보내는 인사 같은 음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또 다른 영감을 찾아서 오리배를 타고 다시 호수를 한 바퀴 더 돌 계획입니다. 윤덕원(브로콜리너마저) 드림 1. 커피를 마시고 (영감이여 오라) 저는 정말로 마감을 앞두고 커피를 마시고 낮잠을 청한 적이 종종 있는데요. 돌이켜 보면 뭔가 느슨하게 긴장을 풀면서 각성하고 싶은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큰 소용은 없었고, 대부분은 울면서 밤을 새우거나 타인들의 시선이 있는 카페에서 무형의 사회적 압박을 느끼며 보내는 쪽이 성과가 있었습니다. 곡에 수록된 앰비언스도 그와 같은 마감의 시간에 카페에서 녹음된 소리입니다. 이번 앨범 작업은 대체로 혼자 진행했기 때문에 마감이 없는 것이 큰 문제였는데요, 발매일을 지정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애인과 헤어지고 죽상을 한 채로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젠 좀 내려놓고 마음을 다잡으면 어떻겠냐는 말에, '올해가 다 가기 전 까지는 기다려 보려구요'라고 답하고는 했지요. 그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남의 일에 굳이 한소리 얹고 싶어지는 마음의 강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우정도 노래도 얻을 수 있었죠. 다행히 그 친구는 사랑도 되찾았습니다! 어쿠스틱 밴드 신나는 섬이 편곡과 연주를 맡아주셔서 풍성하고 신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다년간 그들의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아왔기에 특별한 디렉션 없이도 제가 기대한 바 그대로의 멋진 곡으로 완성해 주셨습니다. 3. 꽃점 결론이 뻔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참 바보같이 느껴지지만, 자신의 일이 될 경우에는 그런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 답을 해 준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솔직히 털어놓는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이 노래를 만들어 둔 이후에 갑자기 대세가 된 AI가 이런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성에 있어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꽃잎으로 점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한 거라면… 참고로 꽃들은 대체로 홀수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는군요. 저는 오랜 시간 짝수가 더 많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나 봅니다. 4. 친환경 달 여행 나름대로 비장의 신곡으로 솔로 공연에서 간혹 선보이던 노래를 우희준 님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공연장에서 한번 인사를 나눈 뒤, 녹음을 하기로 한 날이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요. 라이브레코딩으로 함께 녹음했고, 세 번째 연주가 그대로 앨범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4트랙 카세트레코더로도 동시에 녹음해 보려고 했는데,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일부를 싱글에 함께 실었습니다. 처음 음악을 만들 때부터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레코더가 드디어 은퇴하게 되는가 생각했지만, 나중에 살펴보니 카세트테이프의 문제였습니다. 미개봉이라 오히려 상태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5. 평남지향사 군 전역 후 학원에서 한국지리 강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반도의 지질구조선에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입니다. 고사리 등 식물들이 자라던 곳은 석탄이 많이 나고 공룡이 많던 곳에는 석유가 나야 하는데 왜 우리는 유전이 없는 것일까요. 동해안 유전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거 사기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아기공룡 둘리와 고사리손의 소년, 소녀들과 고성 공룡발자국도. 하지만 이제는 우리 화석에너지보다는 신재생에너지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날씨를 보면 좀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6. 관악청년포크협의회 저의 첫 번째 공식 팀(?)이었던 관악청년포크협의회를 하면서 2집이 나온다면… 하고 만들었던 노래인데요. 막상 이후에는 활동이 없어서 발표되지 못했던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주년 기념 공연활동을 하면서 몇 번 불러보고 자신감을 얻어 앨범에도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4트랙 레코더로 녹음했던 버전이 주는 느낌을 살리고자 많이 노력했는데 결국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하고, 과감하게 처음 데모를 앨범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다만 가사 일부를 바꾸게 되어 원래의 레코더로 보컬 녹음을 시도, 원곡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보았습니다. 저렴한 드럼머신과 직접 연결한 기타 베이스의 로파이한 리듬감이 일품입니다. 이건 절대로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생활고로 악기를 예전에 다 팔아버림). 7. 4 4번째 만든 자작곡이라 제목이 4입니다. 앞서 언급한 관악청년포크협의회 1집 앨범에 수록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었죠. 기타 주법을 잘 모르는 채로 뭔가 보사노바 같은 것을 만들려고 했던 어설픔이 담겨있습니다. 애매한 코드를 몇 개 쳐서 생기는 울림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플랫파이브 코드였습니다. 이후에 '앵콜요청금지'를 만들 때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헤드셋 마이크를 이용해서 보컬에 이상한 효과를 추가했습니다. 메인 마이크로는 로파이한 전화기 마이크를 사용했는데, 3번 트랙 '꽃점'에서도 사용했습니다. 8. 여름이 다 갔네 오은 시인의 시 '갔다 온 사람'에 곡을 붙여서 만든 노래입니다. 2021년 발표했던 버전. '여름'이라는 테마가 이어지는 것을 의도했습니다. 원래 시의 내용의 대부분을 줄글로 그대로 가사로 만들어서, 듣다 보면 상당히 긴 분량의 본편 시를 외우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노래 만들기의 방법이 있지만 결국 저에게 가장 유효했던 건 말과 글의 모양 사이에 흐르는 리듬감을 잡아내기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 준 작업입니다. 9.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에 대한 노래가 있는데 또 다른 노래를 만드는 게 맞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졸업이라는 선을 통과하는 사람으로서 사는 시간보다, 그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사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느리고 지긋한 시간감각은 나 자신이 배경에 녹아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요. 빠르게 움직이는 기차에서 먼 산을 바라보면 잠시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요. 왠지 저도 그때 교실에서 창밖 너머 먼 곳을 보며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 노래는 남아 '노래로 만든 것'은 신기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아시나요? 원소 주기율표를 아직도 외우거나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를 이상하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요. 저는 아직도 제가 일단 완성한 노래들의 대부분을 기억하는 편인데요, 희한하게도 더 과거의 못난 노래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 '노래는 남아'는 그 시절의 나와 노래들에게, 그리고 함께 노래를 만들던 사람들에게 전하는 노래입니다. 그때 만들었던 노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가 마치 '내가 만든 노래의 무형문화재'가 된 기분이 들지만. 그 노래를 함께 들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고, 언젠가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때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 이건 '보편적인 노래' 인가… 11. 영화 같은 날 SBS 라디오 '시네타운'에 출연하던 시기에 만들었던 시그널 음악입니다. 시그널 음악을 만들었지만 아쉽게 종영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기쁩니다. 노래도 잘 만들어진 것 같구요. 12. 오리배 (CD only) 앨범에 들어갈 노래들에 대한 생각은 다 마쳤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침대에서 누워있는데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최대한 다른 자극을 피한 채로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메모장에 가사를 적었는데 거의 완벽했던 기억입니다. '겨우'가 16마디 안에 두 번 나와서 한번 뺐는데요, 어딘지 모르시겠죠? 왠지 이 마지막 노래는 꼭 들어가야 할 것 같으면서도 앨범의 나머지 곡들의 결과물 같은 느낌이라 같은 바구니에 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고민하다가 급하게 녹음해 시디에만 싣습니다. 이러면 앨범에 포함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요.
  1. 01 커피를 마시고 (영감이여 오라)
  2. 01 올해가 다 가기 전에
  3. 01 꽃점
  4. 01 친환경 달 여행
  5. 01 평남지향사
  6. 01 관악청년포크협의회
  7. 01 4
  8. 01 여름이 다 갔네
  9. 01 졸업식이 끝나고
  10. 01 노래는 남아
  11. 01 영화 같은 날
  12. 01 오리배 (CD only)
음원/앨범 2026.8.17 (월)
트왱